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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일상

경제개발과 자연보호 , 자연보호와 경제개발



누구나 한번쯤 이런상상해본적이 있을것이다. ‘산소가 없다면? 어떻게될까’ ‘공기가다 오염된다면?’ ‘지구에 한그루의 나무도 존재하지않는다면?’ 답은 명확하다. 인류는 존재 할수 없다.

60년대 이후 브라질정부는 세계의 ‘산소탱크’라고 불리우는 아마존에 대한 개발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마존의 20%에 가까운 생태계환경이 파괴되었다. 인류의 허파가 점점 줄어드는것과 다름이 없다. 그럼 여기서 의문점을 가지게된다. 왜 브라질정부는 환경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개발하려 하는것일까? 여기에는 경제논리가 숨어있다. 아마존을 개발함으로써 얻을수있는 금전적 가치는 72억달러 그 이상이라고한다. 그리고 브라질정부는 금전적 혜택을 위해 세계의 ‘산소탱크’를 스스로 포기한것이다. 하지만 브라질정부의 이런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수만은없다. 낙후 국가에 속하는 브라질 입장에서는 아마존 개발로인한 경제적 이득을 다시 재투자함으로써 자국민의 ‘경제적’ 삶의 질을 조금이나마 향상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마존의 사례처럼 쉽게 볼수있듯이 환경과 경제는 상충관계이기도 하면서 필수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인류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과 경제 양자모두 필요하다. 자연환경이 파괴되면 기온상승, 온난화등으로 인해 미래세대가 피해를입게되고 경제가 후퇴하게되면 현재 삶의 질은 낮아질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연환경과 경제논리 사이에서 인간은 최선의 대안을 선택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환경과 경제 사이에서의 인간의 ‘최선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은 경제개발을 우선순위에 두고 자연생태는 현상유지하거나 악화를 최소화하는 방향이다. 사람들이 규정지은 이러한 자칭 ‘최선’의선택은 지금까지 모든 경제개발의 절대적 지표로 활용되었다.
그럼 역으로 생태계복원을 우선 순위에두고 경제개발은 현상유지 혹은 악화하는 방향으로 선택한다고 가정하자. 이 선택은 최선의 선택인가 아니면 차선의선택인가 아니라면 최악의선택일까?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최악의 선택이다. 현재의 윤택한삶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 삶의질 향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념은 말그대로 통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선택에 있어서 자연환경복원을 우선순위에 두고 경제개발을 후순위에 두는것은 비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경제개발에 비해 자연복원혹은 보호를 우선시하는것이 비록 불확실한 미래에대한 투자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보호는 미래 다시말해 후세대에대한 투자일뿐만아니라 동시에 현 세대에대한 ‘경제적’투자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떤사람이 등산을 좋아한다고 가정하자. 여기에서의 등산은 경제논리가 침투되지않는 자연을 의미한다고 가정한다. 등산을 통해 이사람은 심리적 안정을얻고 스트레스 해소도한다. 주말에 등산을 하고 주중에는 본연 업무로 돌아간다고 보자. 이러한 심리적안정이나 스트레스해소는 업무수행능률이나 효율면에서 순기능을 할수 밖에없다. 즉, 자연 보호는 미래세대에대한 투자일뿐만아니라 동시에 현세대에대한 투자이다.

하지만 경제론자 입장에서는 자연보호를 우선시하는 논리를 받아 들이기 힘들것이다. 자연으로오는 혜택 모두 경제발전과 과학발전을 통해 보완가능하다고 충분히 논박할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소, 공기와같은 범지구적 자연환경문제에 대해 경제개발로 삶의질이 더 향상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얼마든지 대처가능하다고도 주장할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있다. 경제론자의 뒷받침해주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게 양식어업이다. 양식어업이란 물고기나 조개류따위를 인공적으로 길러서 잡는 어업을 의미하는데, 기존 경제적,환경적구조가 뒷받침되지않았을때는 양식어업을 하기 어려웠으나 현대에는 어류자원 공급확대와 멸종자원보호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럼 양식업이라는 명목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경제개발이 정당화될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양식업은 경제논리가 자연환경을 커버(cover)한 유일무이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말해 어떠한 논리로도, 어떠한 명목으로도 ,경제개발이 자연보호에 우선시 되어서도, 경제개발에 의해 자연의 본질적의미가 퇴색되어서도 안된다.




얼마전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본적이 있다. MBC에서 주최한 강원도지사후보 토론회에서 한나라당 이계진후보가 “쑥부쟁이, 도롱뇽 몇 마리죽는다고...”라는 발언을 했다는 취지의 기사였다. 본래 발언은 이러했다. “자연보호가 중요하지만, 쑥부쟁이 때문에, 전국에 수억 마리 있는 도롱뇽 몇 마리 죽는다고 공사를 못하는 현장은 자연보호일까 발목잡기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이 후보가 단정지어 말하진 않았지만 기사를 보고 황당함을 감출수 없었다. 경제개발을 명목으로 자연파괴를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소한 자연이라면 얼마든지 개발가능하다는 모순된 인식을 가진사람이 한 지역의 도지사 후보에 있다는 사실(Fact)이 내가 느낀 ‘황담함’을 가감 시켰다. 물론 이 후보의 말처럼 도롱뇽 몇 마리죽는다고 모든 환경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젖는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사소한것을 무시해 큰 해를 입는다는 의미이다. 이 말의 속뜻처럼 사소한 것의 본래 가치를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훼손한다면 말그대로 미래세대들이 입을수 있는 ‘옷’이 젖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수 도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제와환경과의 밀접한 관계를 목격하게된다. 다만 우리가 무의미하게 스쳐지나갈뿐이다. 작게는 집근처 공사현장, 벌목현장, 무분별한 야생동물사냥, 그리고 넓게는 요즘 이슈화되고 있는 청계천사업등 모두 환경과 경제논리가 숨어있다. 그리고 우리 인류는 환경과 경제의 중심축에서서 조정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고있다. 다만 현재와 미래세대를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서 조정해야하는 조정자가 지향해야할 방향이 자연을 파괴해 당장이득을 얻겠다는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 환경위에 군림할수 있다는 편협된 인간중심적 경제사고관에서 벗어나야한다. 나아가 ‘말’로만 자연환경과 동반자 인식을 가질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자연환경과 상호 교감해나가야한다. 이건 개인적인 내 주관일지 모르겠지만 리우협약, 교토의정서,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 등은 인류가 자연과 성공적으로 교감한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연과 몸으로 느끼며 교감해야한다. 환경과의 교감부분은 경제와 환경의 연관성처럼 필수다. 선택이 아니라는 의미다. 만약 끝내 인류가 자연과의 교감을 실패한채, 경제논리만 앞세워 계속 자연파괴를 감행한다면 지금까지 인류가 자연개발을 바탕으로 누려온 경제적삶은 자연에 의해 한순간에 빼앗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직접 목격하고 있는 지구온난화현상은 어쩌면 단순한 경제논리에 얽매여 자연을 훼손하는 잘못된 인간의 사고관에 대한 자연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일지도모른다.

-참고출처

아마존관련자료 - http://segyewa.com/466

양식업의어원 -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25872900&re=y

이계진후보 발언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8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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