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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시인 쇼팽 이야기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마음, 피아노의 영혼이라고 일찍이 러시아의 대피아니스트 안톤 류빈슈타인이 쇼팽을 찬양하며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쇼팽만큼 진정으로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 음악를 쓴 음악가는 없다고 말입니다.  프레테릭 프랑스와 쇼팽의 39년 남짓한 짧은 인생은 폴란드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의 유해는 종언의 땅 파리의 펠 라세즈 묘지에 그가 생전에 바르샤바에서 가지고 온 한 줌의 흙과 함께 묻혓지만, 유언에 따라 심장만은 조국의 수도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 쇼팽의 이야기 좀 더 알고 싶지 않으신가요?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프랑스 사람이 아버지와 폴란드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포란드를 조국으로 하여 1810년 2월 22일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의 로렌주 낭시에서 태어나 1788년 17세 때 폴란드를 찾은 교양 있는 신사였다고 합니다.  그가 이 먼 북쪽 나라에 직업을 얻고자 한 것은 당시 그가 태어난 프랑스는 이른바 프랑스 혁명으로 불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살다보니 무한한 애착이 생겼습니다  그는 우선 생활으 ㄹ개척하기 위하여 프랑스 말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고 합니다  다행히 바르샤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사는 스카르백 백작댁의 자제를 위한 가졍교사가 되었는데 이 집에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으로 폴란드의 옛 귀족 출신의 여성 유스티나 크지자노프스카가 가정부로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이 집 기숙하고 있을 때 1806년에 백작 부인의 중매로 유스티나와 결혼하였습니다

 

 

 

 

 

쇼팽곡의 스며든 이야기

 

즉 쇼팽은 핏줄로 보아서는 프랑스인과 포란드인과의 혼혈아였지만 그는 폴란드인임을 진심으로 자랑삼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점에서는 아무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쇼팽은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그의 후반생 20년을 주로 프랑스에서 지내고 폴란드에는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쇼팽이 폴란드와 프랑스를 위해 한 역할은 다 함께 커서 그 어느 한 쪽을 과대평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컨대 그가 최초로 쓴 곡은 스카르백 백작부인에게 바쳐진 폴로네즈g단조와 B장조의 두곡은 쇼팽 7살 때 작곡입니다. 최후의 작품은 마주르카 f단조 작품 68의4 입니다  피아노 솔로로 된 저 ㄴ17의 폴로네즈와 모두 60여곡이나 되는 마주르카는 소팽에 의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예술적인 순결성이 주어진 폴란드의 대표적인 민속 무용곡입니다

 

이에 대해 전부 20곡으로 된 왈츠는 세련된 파리의 살롱 취미를 반영하는 악곡이었습니다  그리고 4곡의 발라드는 두 나라의 이상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쇼팽의 생가는 바르샤바에서 50킬로쯤 떨어진 젤라조바 블라에 있는데 지금은 소팽 박물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쇼팽의 아버지는 당시 이곳의 영주인 스카르백 백작 댁에서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있었는데 쇼팽이 태어난 그 해에 읽는 바르샤바로 이사가서 살았으므로 쇼팽은 바르샤바 토박이라 해도 무관할 것입니다  1남 3녀로 이루어진 쇼팽가는 모두가 한결같이 우수하였다고 합니다.

 

 

 

 

 

 

 

 

쇼팽이 음악가로서 되기까지

 

 

 

1남 3녀 중 둘째 자식으로서 독자인 프레데릭은 월등히 뛰어났다고 합니다  애기 때부터 피아노 건반 두드리기를 좋아하며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습하기 시작하였고 6살에는 보헤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지브니 선생에게 정식으로 배웠는데 피아노 솜씨는 놀라울 만큼 발전했었다고 합니다 8살 때는 이미 어엿한 신동피아니스트로 이해 2월 26일 채라티 콘서트에서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하며 폴란드 귀족들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 불리고 그 재능이 높이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이 무렵부터 쇼팽이 가장 잘 하였던 것은 피아노 즉흐 연주로 그 뛰어난 천분은 생애를 통하여 항상 친지들을 경탄게 하였고 그것은 또한 그의 작품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어 쇼팽은 12살때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유제프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등을 통한 작곡을 정식 교육 받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쇼팽이 깊이 경애하며 마지않았던 이 총명한 교수는 쇼팽의 흔하지 않은 독창성을 가진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고리타분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도록 천재는 자기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앞세워 그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자유스럽게 맡겨두었습니다  이것이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게 한 소치이기도 하였습니다  쇼팽은 이후 한번도 정식 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온 마음을 쏟게 되었습니다. 1824년 14살 때 쇼팽은 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의 일반적인 교육은 받지 않고 오직 작곡에만 전력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총명하였으므로 모든 교양과 취미를 쌓았으며 특히 연극에 재능이 있어서 자매들과 함께 희곡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15세가 된 1825년에 그의 처녀자 론도Op.1 이 출판되었으며 18세 때는 베를린으로 가서 나라 밖의 넓은 유럽 음악계를 견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소년 쇼팽은 음악가로서 차츰 어른의 세계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쇼팽의 재능은 분명히 비범한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 문하의 명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홈멜과 알게된 것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바르샤바를 찾은 파가니니의 묘기에 접한 것이 그에게 한층 큰 작그을 주었습니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의 3년 과정을 마친 1829년 처음으로 당시 유럽악단의 중심지 였던 빈으로 가서 2회의 연주회를 가진 쇼팽은 이미 비할 데 없는 미감과 기교로 세인에게 크게 주목받는 젊은 피아노 연주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쇼팽은 이때 빈에서 자기가 쓴 작품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변주고-라치 다렘 라 마노 를 출판하는 기회를 얻었는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로부터의 주제에 의한 이 변주곡은 그 뒤 몇년 되지 않아 낭만파 작곡계의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때 아직 신진 작곡가이며 평론가이던 슈만의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십시오 여기 한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슈만의 유명한 비평문에서 절찬을 받았습니다 이 비평문은 작곡가 쇼팽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가지 그의작품은 이미 30곡이나 작곡되어 있었습니다

 

이 같이 음악적인 성공을 거두고 고국에 돌아간 쇼팽은 다잇의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인 이사적인 여성을 발견하여 남모래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녀에 대한 연모의 정은 중간 아장의 아다지오 부쳐서 슨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완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소팽이 긑내 자기 마음속을 털어놓지 못한 이 첫사랑의 여인은 쇼팽과 같은 무렵 바르샤바 음악원의 성악과 학생이던 콘스탄치아 글라도코프스카 였습니다.  쇼팽은 너무나 내성적이고 여성적인 기질 탓으로 사랑의 고백을 하지 못하고 남몰래 고민하던 끝에 그녀가 보이지 않는 먼 곳에 가 버리면 자연히 고민도 사그라 질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플라토닉 사랑, 쇼팽

 

 

거기다가 보다 넓고 보다 높은 예술의 자리를 얻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국가 작용하여 그는 마침내 1830년 11워 1일 20살 때 바르샤바를 떠나 여행길에 나섭니다  이 여행이 그로 하여금 두번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하리라고는 쇼팽 자신은 물론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바르샤바를 떠나기에 앞서 10월 22일에 쇼팽은 제3회 연주회 즉 고별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이 연주회에서 현재는 출판순서에 따라 제1번으로 알려져 있는 피아노 협주곡e단조 가 초연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적인 애인 콘스탄치아 도 찬조 출연하여 독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쇼팽의 교별이 그녀를 위한 것이었음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 연주회는 콘스탄치아에게 꿈을 품은 쇼팽의 플라토닉한 사랑의 종지부였습니다  또한 그가 조국 폴란드에 이별을 고한 마지막 콘서트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폴란드를 잊지 말아라라는 뜻을 붙여 친구들이 선물해준 은잔에 가득 담은 폴란드의 흙을 여장에 넣고 쇼팽은 마침내 바르샤바를 떠났습니다  동행은 죽마고우인 티투스보이치호프스키로 즐거운 여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쇼팽이 맨 먼저 간 곳은 지난해에 환영을 받았던 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아주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전에 그를 따뜻이 맞아 주었던 이곳의 음악가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또는 이 곳을 떠나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에 머무르는 동안 불행하게도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정치상으로 우호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 사람들을 적대시 하게 되빈다  그리고 함께 온 친구인 보이치호프스키는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쇼팽을 이국땅에 남겨두고 급히 폴란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후 많은 불행이 계속 쇼팽에게 휘몰아쳐오게 되고, 훗날 이 때에 있던 12곡을 정리하여 리스트에게 바친 연습곡집 작품10 과 혁명의 에튀를 작곡하는데 이는 당시 비분과 절망에 몸을 떨던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여름철의 하루였다고 전해집니다

 

 

 

 

혁명의 에튀드